첫째날.
1.
자연스레 여섯시 반쯤 눈이 떠졌다.
애써 다시 잠이 들었다. 내 여행의 로망이라면, 알람이 없이 아침에 일어나 해가 따뜻하게 비추는 늦은 오전에 눈을 뜨는 것.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동네를 산책하는 것.
그러나 눈을 뜨니 여섯시 반이다. 그나마 억지로 노력해 다시 눈을 뜨니 일곱시 반이다. 하는 수 없어 씻으러 내려갔다.
2,
다행히 샤워실에는 따뜻한 물이 잘 나온다. 혹시 소음이 클까 걱정하며 샤워를 마쳤다.
옆 침대에서는 스태프들이 이야기하던 한국 스태프가 자고 있는 것 같다. 조용조용 스킨로션을 바르고, 조용조용 옷을 입고 조용조용 코바코(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왔다.
3.
와, 방에는 햇살이 잘 안들어오더니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무엇보다 햇살이 겨울 같지가 않다. 딱 가을 하늘이다. 어제완 달리 동네, 골목이 또렷이 보인다.
소설 속에 나오는 분교 같은 미술원이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 있다. 하늘은 작은 골목 사이로 새파랗게 떠 있다. 걷기만 하면 된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채 서있는 바로 이곳. 그저 걸으면 된다.
4.
너무 아름다운 아침풍경에 눈물이 다났다.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이 예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저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새삼, 아름다운 것들은 이 세상에 참 많구나. 라고 생각한다. 불도 안 켠 방에서 멍하니 억울함만 쌓아놓고 향할 곳 없는 분노만 쌓아놓던 그 때가 생각난다. 좀 기만적이기도 하다. 여기서야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햇살이 느껴진다. 그것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결국 짓눌려있던 건 나였다.
5.
시간이 느껴지는 동네에 '와'를 연발하며 걷다가 커피하우스 발견, BLK커피하우스라고 써있다. 로스팅기계가 있지만 정말 손바닥만한, 주차장 옆 빈공간에 만든 카페다. 아니 카페라고 하기엔 아무런 인테리어도 메뉴자랑도 없다. 그저 테이크아웃250엔이 다 다. 그런데 상상하던 그런 카페다. 30초 고민하다 들어갔다.
6.
마스터는 여자였다. 계산을 카운터에서 다 하고 가서 앉아야 하는 줄 알고, 우물쭈물하다가 묻지도 않았는데 일본어 못한다고 고백했다. 결국 블렌드커피를 시키고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았다. 뒤 쪽에는 동네 아저씨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사실 나도 건더기를 좀 먹어야 하는데... 아까 카운터에선 메뉴도 못 보고 시켰다. 찬찬히 가타카나 메뉴판을 읽는다. 이게 블렌드 커피고... 이게 카페오레고.... 토스토! 건더기 중엔 이것만 확실히 읽힌다. 커피를 가져다 주셔서 토스트도 시켰다.
7.
알고 보니 모닝세트가 토스트 + 삶은 계란 + 커피였다. 마스터가 알아서 모닝세트로 가져다 주었다. 나는 삶은 계란이 서비스인줄 알고 잠시 당황했다. 그나저나 매우 맛있다. 너무 맛있다. 빵에 버터 바른 건데 왜 이리 맛있지. 커피도 맛있다. 하얀 잔에 검은 커피가 찰랑찰랑 한 것이 긴장한 나의 마음을 다 녹이는 것 같다. 일본 라디오에서 요새 한창 잘나가는 팝송이 나오고, 나는 한국어로 메모를 하고 있다. 뭔가 묘하다. 이 시간에 나는 완전히 파묻힌다. 여기 있는 일주일간 굶지는 않겠구나. 첫 주문을 성공시켰다. 배부른데 아직 달걀이 남았다. 모닝세트 450엔. 정말 자꾸 눈물이 난다.
8.
오늘은 어딜갈까. 고민을 해보다가 갑자기 어제 내가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왔던 길을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간 김에 관광지도도 받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이건 미친짓이었다. 어쨌든 난 감동적인 아침식사 후 교토역을 향해 걸었다. 얼추 감으로, 밑으로 밑으로 걸어나갔다.
9.
정말정말 햇살이 좋다. 골목 사이로 나무 집들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는데 바람에 몸은 움츠려 들어도 마음은 따뜻하다. 오버 세 배 정도 해서 날아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