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첫째 날.
1.
어딜가나 아름다고 어딜가나 새롭고 눈을 못 떼겠다.
골목으로 빠졌다가 다시 대로로 나오고 또 골목을 헤맸다가 대로로 나오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지하철역에 갔다가 어젯밤에 살짝 보았던 그 대로를 따라 걸었다.
그저 걸었다.
2.
하루 봤다고 눈에 익은 번화가가 나왔다. 여행 전에 익숙했던 카와라마치라는 도로가 드디어 나왔다. 이리저리 계획하고 정보를 적어가기 싫어 그냥 쓱 봤던 블로그들의 후기들이 생각났다.
이 근처 어디엔가 무엇이 있는데 어딘지는 모르겠다. 기온이 이 근처 여기인 것 같은데 모르겠다.
결국 모르겠다 투성이었다. 그냥 교토역을 찾아 가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교토역은 여기서 그냥 직진이다. 지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들도 그저 쑥쑥 지나친다.
그래도 다시 또 금방금방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3.
점심시간이고, 내 다리는 터질 것 같다. 아파서. 아침식사도 별 무리없이(?)성공했으니 점심식사도 무리없이 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라면집이나 카레집, 정식집, 특히 점심시간 사람들이 시끌벅적한 시간에는 도저히 들어가질 못하겠더라. 100m전부터 저기는 들어갈 것이다 마음먹었던 몇 포인트들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다시 돌아와서 심호흡을 했지만 못 들어간 곳도 있다. 그러다 드디어 표지판에 교토역이 나왔다.
4.
결국 점심은 못 먹고 두 시쯤 교토역에 도착했다. 사람은 여전히 많다. 관광지도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났다. 무언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줄 알았는데 내가 얻은 거라곤 영어로 된 교토 지도 하나다. 할 일이 너무 급 없어져서 백화점 식품관에서라면 먹을 수 있을까 싶어 교토역과 통하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실패다. 그래도 백화점 의자에 앉아 내가 대체 어디에 갈 수 있을까. 그나마 내가 적어온 카페는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메모를 뒤적였다. 카페 미즈카가 이 근처다. 지나쳐오는 길에 고조도리도, 카와라마치도리도 보았다. 그리고 미즈카는 고조카와라마치 근처다.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걸어서는 이제 더 이상 무리고 이쯤에서 버스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숙소까지 다시 걸어서 갈 수는 없으니까 일일버스이용권을 결국 끊어 버스를 탔다.
5.
고조 카와라마치, 약도에 써 있는 호텔까지 찾았는데 미즈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이쯤되니 정말 다른 의미에서 울고 싶었다. 또 이렇게 찾는 목표가 생기고 나니 지나오면서 보았던 다른 다방, 다른 카페들은 성에 안 찬다. 난 꼭 미즈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몇 바퀴를 그 주위를 돌았건만 어디에도 미즈카는 없었다. 설상가상 이제 해가 떨어지는 시기이다. 어떻게든 요기를 하고,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하지 못하면 난 최악이다. (골목을 헤매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게 되었다.) 몇 번의 동네 가게를 지나치고 나서야 한 밥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적당히 카페스러운 외관이었지만 들어가니 정말 그냥 식당. 무뚝뚝한 아저씨가 마스터인 그런 온갖 종류의 밥이 다있는 밥집. 읽을 수 있는 가타카나가 오므라이스 하나여서 그걸 시켰다. 마스터는 내가 들어올 때 부터 의아한 눈길이었다. 세 시가 넘은 시간에 밥을 먹으러 골목안에 있는 단골만 올법한 식당에 들어온 뜨내기 젊은 여자. 등에 백팩을 메고 뚫어지게 메뉴판을 보다가 결국에 시킨거라곤 오므라이스.
마스터가 무어라고 일어를 했다. 케챱이라는 단어 하나만 들렸다. 왠지 오므라이스 소스를 물어보는 것 같아 하나 알아들은 케챱으로 시켰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데미그라스라는 단어가 들렸고 일본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으려면 데미그라스 소스를 시켜라 라는 흘깃 지나간 블로그 포스트가 생각났다. 이런 낭패가. 그래도 케챱 올려진 오므라이스를 거의 1년 만에 교토에서 아주 맛있게 매우 맛있게 먹었다. 배는 불러 터질 것 같은데 그래도 예의는 그릇을 비우는 거라 들어서 터질 때까지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6.
그렇게 식사를 허겁지겁, 묘한 좌절감에 먹고 나서 지도를 펼쳐들고 당당히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디냐. 싸늘한 반응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아저씨가 엄청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신기하게도 아저씨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대충 짧은 일어로 대꾸하니까 심지어 아저씨가 내 니혼고 굿이란다. 사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주고 받을 수 있다니, 에헤라디야. 자기는 한국말 배워도 절대 나처럼 못할 거라나 뭐라나. 에헤라디야 하는 마음에 더 비굴하게 더 감사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난 큰 길 바로 뒷 뒷 골목에 있는 거였다. 저쪽으로 넘어가면 교토의 번화가 시죠카와라마치다.
7.
이렇게 된 김에 미즈카는 포기하고, 사람들의 블로그에서 보았던 니시키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나의 발길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즉각적이고 치밀하지 않게 움직였다. 지도를 보며 걸으니 진짜 그곳이 나온다. 아, 이게 지도의 매력. 그곳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계속 발을 움직이면 진짜 그곳이 내 앞에 나타난다. 길을 걸으며 몇 번을 상상했던 그 곳이 마치 마법처럼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니시키시장은 역시 시장답게 시끌벅적하고 구경할게 너무 많아 눈이 피로해졌다. 이미 좌절의 하루를 겪은 터라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고 무엇을 사고, 먹고 할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그저 눈만 호강시키며 시장골목을 걸었다. 튀김, 두부, 쯔게모노, 당고, 모찌, 맛차아이스크림, 도시락가게 맛있는 거 천지다. 아, 내가 이걸 다 먹고 돌아갈 수 있을까. 군데군데 빠져나가는 골목 사이로 카페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8.
니시키 시장 끝은 무슨 신사같은 게 있었다. 그 옆으로는 또 상가다. 보니까 테라마치라고 써있다. 아, 생각해보니 오타후쿠 커피집이 테라마치 상점가 맞은편골목 지하에 있다고 했다. 카페 정보수집은 그나마 내가 열심히 한 여행 준비라 생각이 잘 났다. 신나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보니 아, 눈에 익숙한 오타후쿠 커피점이다. 그러나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일 주일 중 하루는 올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 점심 때 로쿠요샤 커피도 발견했으니, 가고자 했던 커피집 중 두 군데나 위치를 첫 날 알아냈다. 비록 미즈카 찾는데엔 실패했지만 이것을 오늘의 성과라고 치자.
9.
그러고는 오전에 발견했던 카와리마치 상가 옆 골목, 프렌치 어쩌고 써있었던 카페를 향해갔다. 오늘 두 번째 커피는 그곳에서. 그 카페가 있던 골목은 번화가 옆 골목으로 그저 많은 상점이 우후죽순으로 있는 골목이라기 보다는 교토의 젊은 애들이 그들의 문화를 즐기는 곳 같았다. 상점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옷 가게와, 소품가게, 그리고 20대-3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드디어 스트리트패션 사진에서 보는 일본 사람들을 만났다.
10.
그래서 난 당연히 그 카페의 분위기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젊은 주인에 프렌치 스타일이라는 문구와 흰 외벽으로 추론해보았을 때 내츄럴 하면서도 심플한, 그러면서 약간의 로맨틱이 묻어있는 인테리어. 적당히 번지는 커피향. 2층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공간적 도도함,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지며 느껴지는 긴장감. 뭐 이런 것들을 상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 마스터는 할아버지에 가까웠고 군데군데 테이블에도 중년 이상의 손님들이 가득했다.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문 앞엔 여행사진이 붙어있었다. 일단은 예상과는 달라 흠칫 놀랐지만 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카페 뤼미에르에 나오는 커피집 같달까. 내가 원래 가고자 했던 다방같은 느낌이랄까. 또 블렌드 커피를 시키고 약간은 자포자기의 느낌으로 소설을 펼쳐 소설을 읽었다.
이미 깜깜해진 밤, 나는 새로운 곳에 갈수도 없고, 관광 여행정보는 아는게 없는터라 수정할 계획도 없다. 그저 소설책을 좀 보다가 새로운 공간에서 촉수를 세우느라 흐름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지도를 펼쳐 여기는 어디, 숙소는 어디, 흥미로운 장소는 어디 하며 지도와 놀았다.
11.
희안하게도 여기 사람들은 카페에 오래 앉아있는 법이 없다.
커피를 다 마시고, 동행한 이들과 얼추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바로 나간다. 덕분에 나도 대충 눈치를 보며 짐을 챙겼다. 그러다가 이렇게 가는 건 너무 아쉬워, 내가 할 수 있는 일본어 중에 가장 자신있고 여행자라는 위치에서 싱크로율 100프로인 여기가 어디인가요를 다시 한 번 외쳤다. 지도를 쫙 펼쳐놓고.... 마스터는 좀 당황하는 듯 했으나 또 친절히 알려주고 여행을 왔는지, 학생인지, 학교는 어떻게 했는지를 물어봤다. 자신도 서울에 와 본적인 있단다. 난 또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가 신기하고 이 상황이 꿈같아서.. 그리고 말이 길어지다간 내 일어 실력이 뽀록날까 싶어 긴장하는 마음에 재치있는 리액션은 보이지 못했다. 그래도,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재미난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겨우 이틀이긴 하지만, 외로웠나 보다. 짧은 대화에도 신이 난다.
12.
그리곤 계산을 하려고 돈을 세는데 잠시 기다려보란다. 그래서 기다렸더니, 바나나케익을 싸주는 것이 아닌가! 나 먹으라고, 손수 바나나케익을 싸주셨다. 내가 할 수 있는 리액션은 감탄사와 아리가또고자이마스 뿐이어서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관광객이어서 그런 호의를 베푼 거겠다 싶다가도, 그럼에도 나같은 미천한 인간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 너무나너무나 감사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내 여행에서도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구나.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곱게 포장된 바나나 케익을 꼭 쥐고 카페를 나왔다. 가방도 가볍고 터질 것 같던 내 다리도 가볍고, 조금 썼던 커피도 단 맛으로 남았고 내 입에선 어제 스태프가 불러주던 쿠루리 노래가 흘러나왔다.
13.
버스를 탔다. 숙소로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또 쿠루리상이 있을까. 어떤말을 하며 받아줄까. 케익을 자랑해야 할까. 어제 기타 연습 하다가 도망가서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새로운 대화를 기대하며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것이 긴장도 되어서 자꾸만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결국 횡단보도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발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앉아서 케익도 뜯어보고 (근데 먹기가 너무아까워서 결국 먹지 못하고 다시 포장지에 넣었다.) 지도도 다시보고 발에 바람도 쐬어주고... 들어가는 인사를 머릿속으로 몇 번 연습해보고....
그러면서 본 밤 건널목은 또 왜 그리 예쁜 것이던가. 신호등도, 색깔도, 그 고요함도 다 아름답다. 뒷 공원에 들리는 기합소리까지.
14.
근데 돌아와보니 스태프는 다른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중이었다. 왠지 그 다른 사람이 부담되기도 하고, 그 분이 힘들었던지 널부러져 있던 상태라 나는 그 쿠루리상에게만 짧은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왔다. 올라와선 이런 숫기 없는 것, 여기서도 결국 똑같구만 하며 내 머리를 몇 대 때렸다. 그리곤 스스로 위로하듯, 바나나케익 냄새를 다시 맡았다. 아, 좋다. 오늘 만났던 사람,걸었던 거리를 조용히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