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시간은 흘러서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몇 주가 지났다. 정말 잠자고 일어났더니 그 모든 것이 먼 이야기만 같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한 건지. 끝나고 나니까 멍한 느낌이다. 그래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도취(?)해서 한 듯 하다.
막상 다 풀어놓고 나니 별것도 아니구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렇게 해놓고 끝은 버벅이었다. 조금만 용기내서 내 입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면 마음은 좀 달랐을까.
아니다. 몇 번의 부딪힘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잠시 이것이 학교라는 것을 잊었던 것 뿐이다. 마음을 다해서 하면 뭔가 말랑말랑 하게 받아들여질줄 알았던거다. 착각했던거지. 지금 난 찬물을 맞고 정신을 확 차린 느낌이다.
이게 정말 리얼리티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며 받아들여야할지. 전자는 그동안 리얼리티를 외면하고 나만의 성을 쌓았던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테고 후자라면 절망 or 행동이 필요할테다. 음 모르겠다. 어느 쪽인지.
어쨌든 너무 나의 물에서 놀았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하지만 난 그게 진정성이라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세상은, 혹은 내가 느끼는 나의 외부의 시선은 이를 외곬이라 보고 있다.
그래 이런 나를 생각하면 난 운동을 하고 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맞는 옷도 아닌 듯 싶다. 그래서 난 계속 열등감 혹은 거리감을 느끼며 그 주변을 배회했던 걸까. 그래서 난 그 때 많이 부족했던걸까. 결국 어떤 경험으로 묶이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던 걸까. 아니, 그냥 난 또 '인정'에 목매고 있는걸까.
생각할수록 '운동'은 미묘한 것이다. 사실 권력과 자본을 거부하는 외곬로서의 삶 자체만으론 운동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한 삶이 되지도 않거니와 그것은 어떤 정치화과정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예전엔 이것도 정치화과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만큼 힘이 없다. 더 큰 권력과 자본이 등장했을 때 그 외곬은 쉽게 절망하거나 쉽게 의기소침한다. 혹은 피하거나.
예전엔 그런 삶 만으로 운동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절대적(?)으로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운동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더라. 나는 인간이고 나는 관계를 맺고 나는 결국엔 이 세계에 살아남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지는 것과 의도적으로 보여지는 것, 위로 향하는 것과 억누르는 것. 그 모든 것의 혼돈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 - 권력, 누구의 것으로 무 자르듯 나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 속에 있다.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묘하다. 함께 꿈을 꾼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그 미묘한 것들이 있다. 그것이 견딜 수가 없다. 그 긴장 속에서 내 욕망을 바라보는 것과 상대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목표'인 지점을 평가하는 것. 상대해야할 현실을 바라보는 것. 타이밍. 의도한 말하기. 종종 멀어지는 머리와 가슴, 그리고 말. 자주 일어나는 질투. 눈에 보여지는 성과. 두려움. 미지의 행위자인 타인을 만나기. 그 질식할 것 같은 긴장. 그 모든 것이 버무려진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이 되고 일상이 되고 결국 하나의 살아가기가 된다. 하지만 그 고작 하나의 살아가기 속에 언제나 성찰의 기준들이 도처에 널부러져 있고 그래야만 한다. 운동을 한다 했을 때 그것이 그냥 하나의 살아가기가 되야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운동은 일정한 무엇을 상정해야 시작할 수 있다. 일정한 이상 혹은 목표 상태. 일종의 더 나은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어느 지점, 혹은 어느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계속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내가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사실 아직 나의 그릇에서 이 모든 것들이 재미있게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별로 재미있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강박으로 하긴 싫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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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원래 할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의미없음'이라는 합리성, 효율성, 정치성의 잣대가 운동에서도 계속 자행될 때,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성과(?)를 판단하는 나 스스로의 잣대가 될 때의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대해서 쓰려고 한 것이다. 결국 세상엔 남는 것. 보여지는 것. 떠드는 것이 기록되고 평가받는다. 좀 cheap하게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칭찬받는다. 그리고 그 보여지는 것은 원래 자신은 당연히 보여지는 것으로 존재했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를 끊고 훨훨날아가 황금날개를 붙이곤 하늘을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그 황금날개를 부러워했다가 천박하다며 욕 했다가 다시 이제 자신은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 절망과 혼돈 속에 땅을 고른다. 이미 역사는 그들에게서 벗어나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어떤 위계성에 사로잡혀있어서 일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것만 보이는 걸까. 그것조차 신경쓰지 않는이, 역사의 흐름 따위, 보여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 확고함, 혹은 자기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확고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억울하지 않을까.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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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한 가지를 쓰면 이 쪽 저쪽에서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고 하는 여러가지 말들이 동시에 튀어나와 혼란스럽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은 이런 나를 가여워하는 방법이다. 비운의 주인공을 만들어서 그 자체로 존재감을 형성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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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렇다. 어떤 식으로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을 보면 짜증날 것 같다. 내가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며 짜증을 내서 그런 건가? 어쨌든 그래서 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어떤 식의 자기변명일 수도 있고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냥 생각나서 쓰고 있는 것이다. 난 나를 더 궁지로 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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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시궁창 속에서도 잘 살아가는 내가 참으로 역겹다.
더구나 말하지 않고 순응하듯이 살아가는 내가 참으로 역겹다.
하지만 언제나 말하고 행동할 순 없는 거라며 내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어서 더 역겨운 것 같다.
그러면서 행동하는 이들을 일정정도 동경 - 질투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서 더더더욱 역겨운 거겠지.
그럼에도 그다지 이 상황을 변신시키고 싶지 않다며 다시 눈을 감는 내가 내 눈에 보여서
그 기절초풍할 역겨움에 그냥 이내 웃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