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순간이 있다.
아 그 공기에 약을 탄 것 같은 순간.
머리가 띵 하면서 그 때 그 곳엔 당신과 나 둘만이 존재한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그 시간을 이어가고 싶은 나는 안타깝게도 그 방법을 몰라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시간을 그냥 보내버리고 만다. 당신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만나는 순간
당신과 나의 놀람이 만나는 순간 당신과 나의 감성이 만나는 순간은 그렇게 그렇게 너무나도 찰나에
사라져버린다.
아, 그래.
하지만 언제나 자신 없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시간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시간 사이의 거리이다.
과연 서로였을까. 정말 당신과 나였을까. 그런 느낌들, 그런 의문들.
이것이 나를 자신없게 하고 슬프게 할 뿐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그 순간을 추억하고 있는 건
그 때 그 찰나는 서로였을 거라는 것에 대해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버틴다.
그래. 그래야 내가 버틴다. 나의 모든 애정은 그 찰나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의 모든 판타지는 그 찰나에 응축되어 있다. 나의 떨림은 나의 욕망은 모두 그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바보같은 나는 그 순간을 가지고 또 하나의 장편 소설을 만들어낸다.
당신에 대한 무수한 이미지, 무수한 욕망을 가지고 난 당신과 내가 주인공인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거울을 보고 있음을. 여전히 나는 혼자고 나는 비루하다는 것을.
나는 '서로'가 될 수 없는 존재임을 그렇게 깨닫는다.
나의 상상이 크면 클 수록 나의 찰나가 낭만적이면 낭만적일 수록 난 한없이 깊은 바다와 만나게 되고
한 없이 깜깜한 하늘과 만나게 된다. 그곳엔 빛나는 당신이 있고 온통 검정색인 상자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내가 있다. 당신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나를 향한 모든 생채기의 시작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