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희를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대신 되돌려 물어보자. 누가 너희더러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논리로 너희를 한심하다고 하는지. 어떤 언어로 너희를 한심하다고 말하는지를 되물어 보자.
바보같이 편입하려고 기를 쓸 것이 아니라 멋있게 탈주를 꿈꾸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이 체제로부터 '탈주'할 바깥이 없다. 이들은 이미 바깥으로 내쳐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착취당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이 체제에서 시장이 정말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자기계발의 화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젝은 모두가 모든 것의 본질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앎'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과 분석이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본질을 알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시시콜콜 하게 알아볼 필요도 없다. 진정한 냉소주의이다. 이들의 냉소주의는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그냥 그대로 이 세상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도 한순간에 정당화해주는 알리바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들이 단명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속물이 되고 모든 가치는 속물의 언어가 된다. 사랑이니 혁명이니 열심히 떠들지만 알고 보면 그것들을 다 자기 이해의 위장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를 믿지 않는 사람, 가치의 이면에는 항상 추악한 자기 이익 추구가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남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속물이라고 부른다.
...............(중략).......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민주주의가 정치적 언어에서 한쪽에서는 냉소주의로 다른 한쪽에서는 속물들의 윤리적 언어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탈정치화 따위의 언어로는 이들을 이해할 수도 이들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적인 가치로 고정해놓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다가 정치가 도덕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도덕'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습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학교가 교육의 공간이며 성장의 발판이라고 생각하면서 교실이 우정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정글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교실에서의 권력관계를 무시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모두 학생들의 개인적 문제나 인성문제라는 식으로 돌려버리곤 한다.
학교 폭력이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 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덜 떨어진 존재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화적 양상 만이 전면에 부각될 뿐이다.
교육 그 자체가 폭력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폭력적인 교육과 비폭력적인 교육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중략).... '그것도 폭력이에요' 라고 맞받아칠 것이다.
서로 말을 섞고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문제와 갈등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마치 소통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며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확인해왔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서, 자주 만나지 않아서 우리는 우리 가족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토론하고 발견하여야 하는 것은 가족끼리든 가족 밖에서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 우리는 늘 치고 박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침묵의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느 것. 문제를 감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감정노동을 감수할 때만이 가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이다.
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명품을 소비할 때 명품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명품을 사기 위해 걷는 백화점이라는 공간, 그 공간에서의 서비스, 그리고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만들어지는 동류의식,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비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소비의 현장에서 두 가지 자아를 발견한다. 그 곳에서 물건을 소비하며 흡족해하는 자기 자신과 그러한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 자신. 나르시시즘에 젖은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과 합리성이다. 정체성은 내가 같은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소비가 낭비나 궁상이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위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소비주의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인정투쟁은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잘 포장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이미 전시회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남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품평하는 주체들이다. 바꿔말하면 우리는 구경되는 상품이면서 동시에 품평당하는 대상인 셈이다.
소비자의 민주주의라고 온세상이 떠들고 소비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엇을 소비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넘어갔고 그들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왜 열정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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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읽을 수 있었다. '나'를 되물었다. 계속 질문이 던져졌다. 읽어 내려갈 때마다 절절했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어찌 살아야 할지는 오리무중이다. 다그치지도, 연민할 수도 없다. 가끔 꿈을 꾸거나 환상을 소비할 뿐이다. 내 방에서 나갈 때마다 갈갈이 쪼개져 쇼윈도우에 널려진 나의 모습을 확인한다. 스스로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자기를 조각내고 있는 날 발견할 뿐이다. 이건 꽤나 골치 아프다. 더구나 난 좀 게으르고 겁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