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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어린아이들은 모두 대체로 충족시켜야 할 동일한 욕구를 가진다. 그들은 모두 마찬가지로 완전한 몫을 가지고 인간 사회에, 말하는 존재들의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지능이 쉬어서는 안된다. " 이 아이는 그에게 서로 다른 언어들을 동시에 말하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 아이는 그 다른 언어들을 따로 또 같이 공부해야 한다. 그것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흔히 서로 모순된다. 아이는 자연이 동시에 그의 눈, 촉각, 모든 감각에 말을 거는 이 모든 관용어들로부터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다. 그는 절대적으로 자의적인 그렇게나 많은 기호들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자주 되풀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주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서 지능은 쉰다.>

p111. 나는 내가 원할 때 관념들을 갖는다. 데카르트는 오성에 대해 의지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지의 힘을 거짓의 힘으로, 오류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의지의 힘을 관념이 명석 판명하지도 않은데 긍정하는 성급함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우리는 지능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의지 부족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정신의 원죄, 그것은 성급함이 아니다. 그것은 부주의다. 그것은 부재다. "의지 없이 또는 반성 없이 행동하는 것은 지적인 행위를 산출하지 않는다. 무의지와 무반성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지능의 산물들 사이에 분류할수도 없고 그 산물들과 비교할 수도 없다. 무위 속에서는 더 많은 행위도, 더 적은 행위도 볼 수 없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백치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 능력이 부재하거나 잠자거나 멈춘 것이다.

p.112 지능의 행위는 지능이 보는 것을 보고 비교하는 것이다. 지능은 먼저 무작위로 본다. 지능은 그것이 본 것을 또 다시 보려면, 비슷한 사실들을 보려면, 그것이 본 것의 원인일 수 있는 사실들을 보려면 조건들을 되풀이하고 만들어내려고 애써야 한다. 지능이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려면 단어들, 문장들, 형상들을 형성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천재들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가장 자주 쓰이는 지능 훈련 방식은 바로 되풀이하기다. 되풀이하기는 지겹다. 첫 번째 악은 게으름이다. 자리를 비우고, 반만 보고, 보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본다고 믿는 것을 말하기는 더 쉬운 일이다. 그런 식으로 부재의 문장들, 정신의 어떤 모험도 번역하지 않는 그러므로가 만들어진다. "나는 못 하오"는 이러한 부재의 문장들의 예다. "나는 못 하오"는 어떤 사실/행적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이런 단언에 상응하는 정신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언은 아무 것도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가 지능의 행보를 옥죄느냐 풀어주느냐에 따라 말은 채워지거나 비워지게 된다. 의미작용은 의지의 작업이다. 바로 그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비밀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자들의 비밀이기도 하다. 신체에 꼭 필요한 습관들을 들이기 위한 노력, 지능에 새로운 관념을 명령하고 그 관념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명령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우연히 산출된 것을 의도대로 다시 만들고, 불운한 상황을 성공의 기회로 바꾸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p.114
우리가 말하는 의지란 행동함으로써 스스로를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가 자기로 되돌아가는(반성하는) 것이다. 이 합리성의 온상, 이 의식 그리고 자기를 현동적인 이성적 존재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지능의 운동을 키운다. 이성적 존재는 먼저 자신의 역량을 아는 존재이자, 그 역량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존재이다.

p.115
모든 어리석은 짓은 악덕에서 온다." 누구도 악의, 다시 말해 게으름에 의하지 않고서는 또 이성적 존재가 자신을 바쳐야 할 것이 하는 말을 더는 들으려 하지 않는 욕망에 의하지 않고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악의 원리는 행위의 목적인 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불성실에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더 이상 플라톤의 방식으로 너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라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네 안에서 너를 속일 수 없는 것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너의 무능은 걷기를 게을리 하는 것일 뿐이다. 너의 겸허함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머뭇거리는 오만한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악은 헤매는 것,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 자기가 말하는 것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가 무엇인지를 잊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길을 가라
 이 진실함의 원리는 해방 실험의 한가운데 있다. 그것은 어떤 과학의 열쇠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마다 진리와 맺는 특권적 관계이며, 각자를 그의 길, 연구자가 되는 그의 궤도에 올려놓는 관계다. 그것은 인식하는 힘의 도덕적 토대다. 그것은 인식하는 힘을 윤리적으로 정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대에 대한 하나의 사유다.

p.124
생각은 진리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표현된다. 생각은 나눠지고, 이야기되고, 다른 이에게 번역되며, 그것을 들은 다른 이는 그것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이 다른 번역은 다음의 유일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소통하려는 의지. 다른 이가 생각한 것, 그가 해주는 이야기 말고는 어떤 보증도 없는 것, 어떤 보편적인 사전도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 그런 생각을 짐작하려는 의지. 의지는 의지를 짐작한다. 이 공통의 노력 속에서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의는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나는 생각하고 나는 나의 생각을 소통하길 바란다, 나의 지능이 기술을 가지고 임의의 기호들을 이용하자마자, 지능은 기호들을 조합하고 구성하고 분석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표현, 이미지, 물질적 사실이 이제부터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의 초상, 다시 말해 비물질적인 사실의 초상이 될 것이다. 초상은 나에게 생각을 떠오르게 만들 것이며, 나는 내가 이 초상을 볼 때마다 나의 생각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바랄 때 나 자신에게 나를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다른 사람과 대면하며, 나는 그가 있는 가운데 나의 몸짓과 말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는 원한다면 나를 짐작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말로 말들의 의미작용에 합의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은 말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은 짐작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전부다. 이 의지의 협력에서 두 사람에게 동시에 보이는 생각이 나온다.

p.126
어쩌면 우리는 이제 보편적 가르침이 경이로운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보편적 가르침은 그저 두 이성적 존재 사이의 모든 소통 상황을 움직이는 동력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두 무지한 자와 그들이 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책의 관계는 그저 생각을 단어로, 단어를 생각으로 번역하고 역번역하기 위해 이 매순간의 노력을 철저히 한다. 이 작동을 주재하는 의지는 마술사의 비결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떤 인간도 결코 언어활동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한다는 말을 그것의 참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물들의 베일을 걷어내는 터무니없는 힘이 아니라, 한 화자를 다른 화자와 직면하게 하는 번역의 역량으로 말이다. 바로 이 역량이 '무지한' 자로 하여금 '무언의' 책에서 그것의 비밀을 뽑아낼 수 있게 해준다. <파이드로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두 종류의 담론이 있어서 그 중 하나는 '자신을 도울' 힘을 박탈당하고, 항상 같은 것을 어리석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말해졌든 씌어졌든 모든 말은 하나의 번역이다. 그 번역은 역번역 속에서만, 들린 소리나 쓰인 흔적의 가능한 원인들을 발명하는 가운데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번역은] 어떤 이성적 동물이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모든 지표에 매달려 짐작하려는 의지다. [나에게 무언가를 말한] 그 이성적 동물은 나의 그 짐작하려는 의지를 하나의 이성적 동물이 가진 영혼으로 간주한다.

p.128
즉흥작은 인간 존재가 제 자신을 알게 해주고, 자신의 본성 속에서 이성적 존재, 다시 말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와 비슷한 자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단어를 만들고, 형상을 그리고, 비교를 하는" 동물임을 확인시켜주는 훈련이다. 우리 지능의 덕은 아는 것이기보다 행하는 것이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행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행함은 근본적으로 소통 행위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는 무엇이건 행하는 능력에 대한 최상의 증거다." 말하는 행위에서 인간은 그의 앎을 전달하지 않고, 시로 짓고 번역하고 타인들도 같은 것을 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장인으로서, 즉 도구를 다루듯 단어를 다루는 자로서 소통한다. 인간과 인간은 손으로 만든 제작물로 소통하듯 이 그의 담론에서 쓰인 단어로 소통한다.

p132
물론 그것은 대작을 만드는 것과 거리가 멀다. 자코토의 학생들이 했던 작문을 높이 사던 방문객들도 학생들이 그린 그림과 회화 앞에서는 자주 뾰로통한 얼굴을 한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정식에는 어떤 오만도 들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거기에는 모든 이성적 존재가 지닌 힘에 대한 정당한 느낌이 들어간다. "그래, 나도 화가다!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것에는 오만이 없다. 오만은 우리나 당신들이나 화가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 죽여 말하는 데 있다." 그래, 나도 화가다는,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 나에게도 나와 비슷한 자들과 소통할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방법은 그것의 도덕과 같다. " 보편적 가르침에서 사람들은 영혼을 가진 모든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보편적 가르침에서 사람들은 인간이 쾌락과 고통을 느끼며,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의 일치 때문에 그가 이 고통과 쾌락을 느꼈는지를 아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와 닮은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자신에게 고통과 쾌락을 초래한 상황 속에 비슷한 자들을 놓아두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자기가 겪는 느낌들을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의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 알자마자, 만을 그가 소통 수단을 선택하고 이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는 다른 이들도 그 느낌을 겪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배워야 하는 것은 언어다."

p.134
예를 들어 기나긴 전쟁에서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이 다정한 어머니를 떠올려보라. 그녀는 전율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 이 한참 동안의 포옹, 행복의 순간에 조마조마해하는 사랑의 포옹, 또 헤어질까 두려워 하는 듯한 사람이 담긴 포옹. 눈물 속에서도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 여러 뜻을 동시에 담은 눈물의 언어활동(이 입맞춤들, 이 응시들, 이 태도, 이 한숨들, 이 침묵까지)의 통역 노릇을 하기 위해 그저 미소를 머금은 입술." 요컨대 이 모든 즉흥이 가장 설득력 있는 시가 아니겠는가? 당신은 그 시에서 감동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을 소통하려고 해보라. 서로 모순되고 무한히 미묘하게 변화하는 이 생각들과 느낌들의 순간성을 전달해야 하고 그것을 단어와 문장의 잡목숲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생각의 개별성과 공통 언어 사이에 제 3항을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시 다른 언어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발명한 자의 말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여전히 배워야 한다. 책속에서 이 표현의 도구들을 찾아내야 한다. 문법학자들의 책에서 찾아낼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모험을 하나도 모른다. 웅변가들의 책에서 찾아낼 것도 아니다. 그들은 짐작하게 만드는 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듣게 만들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무 것도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명령하길 바란다. 즉 지능들을 묶고, 의지들을 복종시키고, 행위를 강제하길 바란다. 느낌과 표현 사이의 이 틈, 감동을 표현하는 무언의 언어활동과 언어의 자의성 사이의 이 틈에 대해 작업한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영혼과 영혼 자체의 말 없는 대화를 듣게 만들려고 시도했던 자들, 정신들의 비슷함에 대한 재기에 그들이 하는 말의 모든 판돈을 걸었던 자들에게 배워야 한다. 

p139. 
우리가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그만큼 기술을 탐구해야 하며, 언어의 자의성을 가로지르거나 우리 손으로 만드는 작품에 대한 모든 물질의 저항을 가로지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겪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하는 바보 만드는 교훈과 하나하나 반대되는 예술가의 해방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중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에서 예술가다. 


p.153
몇몇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원죄를 단순 부주의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그들처럼 악이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부재가 하나의 거부임을 안다. 부주의한 자는 그가 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보지 않는다. 부주의는 먼저 게으름, 즉 수고스러움에서 빠져나오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게으름 자체는 살의 무감각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다. 이성적 소통은 자기에 대한 존중과 타인에 대한 존중 사이의 평등에 바탕을 둔다. 소통은 이 평등을 계속 입증하려고 애쓴다. 지능을 물질의 무게로 떨어뜨리는 게으름의 원리는 무시다. 이 무시는 겸손을 자처하려 한다. 배워야 한다는 과제를 모면하고 싶어하는 무지한 자는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겸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경험으로 안다. 자기 무시는 항상 타인에 대한 무시이기도 하다.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학생은 자신이 한 즉흥작을 짝꿍의 평가에 맡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상대가 말한다. 나는 당신의 방법이 이해가 안 돼요. 나는 실력이 없어요.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겠어요. 당신은 재빨리 그가 무슨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듣는다. "그것은 상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되니까요. 나 같은 인간이 말이지요!" 그것은 모든 연령대와 모든 사회층에 마찬가지다. "자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고 자처하는 이 존재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공부, 그들이 흥미없어하는 훈련에서 면제받기 위한 구실을 바랄 뿐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설득당했는가? 잠시만 기다려보라. 그들이 말하게 내버려두라. 끝까지 들어보라. 스스로 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이 겸손한 인물이 청중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쏟아내는 연사의 말을 마친 뒤, 그가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판단이 얼마나 견고한지 당신은 들리는가? 그는 너무도 뛰어난 통찰력을 갖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그를 피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그를 내버려둔다면 마침내 변신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 겸손은 오만으로 바뀐다.

p.158
따라서 사회 세계는 그저 비-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무분별의 세계, 다시 말해 불평등에 대한 정념에 사로잡힌 왜곡된 의지가 활동하는 세계다. 계속해서 개인들은 비교를 통해 서로를 묶으면서 이 무분별, 이 바보 만들기를 재생산한다. 제도는 이 무분별과 바보 만들기에 법령을 부여하고, 설명자들은 두뇌 속에 그것들을 응고시킨다. 이렇게 무분별을 생산하려면 개인들은 자기 정신으로 만든 작품들을 이성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들이는 그 만큼의 기술과 지능을 그 일에 써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일은 애도작업이다. 전쟁은 사회 질서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치명적인 물리력도,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어떤 미쳐 날뛰는 무리들도 상상하지 말자. 전쟁은 인간이 만드는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먼저 말하는 행위다. 그러나<전쟁이 하는>말은 다른 지능과 다른 담론을 불러일으키는 역번역자의 빛을 발하는 관념들의 후광을 거부한다. 전쟁에서 의지는 더 이상 스스로 짐작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짐작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전쟁 속에서>의지가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인의 침묵, 말대꾸의 부재, 동의라는 물질적 응집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추락이다. 
 왜곡된 의지는 쉼 없이 지능을 쓴다. 그러나 근본적인 부주의의 토대 위에서 그렇게 한다. 왜곡된 의지는 패권에 협력하는 것, 다른 지능을 없애는 데 복무하는 것만을 보독록 지능을 길들인다. 

 p.163
모든 말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과 사물들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이 시가 시 말고 다른 것인 체할 때, 시가 스스로를 진리라고 강요하고, 행위를 강제하고자 할 때 왜곡이 만들어진다. 수사학은 왜곡된 시학이다.

수사학은 말하는 존재의 시적인 조건에 반기를 드는 말이다. 그것은 입 다물게 하기 위해 말한다.

사람들은 곧잘 <침묵의>순간이 말을 행위로 만드는 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의 순간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히려 행위가 결핍된 순간, 지능이 부재하는 순간, 의지가 굴복하는 순간, 무게의 유일한 법칙에 인간들이 복종하는 순간이다.

p167.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상가가 노동자의 지능을 무시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노동자가 농민을 무시하고, 농민이 여성을 무시하고, 여성이 이웃 여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사회의 무분별을 집약하는 정식은 우리가 우월한 열등자들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있다. 각자는 그 역설 속에서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상상하는 자에게 복종한다. 각자는 대중과 구별된다고 자처함으로써 대중의 법칙에 복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