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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목록을 가득 갖고 있는 사람은 그 목록에 의지해서만 사물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이란 사실은 무능력에 대한 고백이다. 그 목록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록이 아무리 세밀하고 체계적이어도 생성하는 세계는 언제나 목록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넘쳐나고 새로운 것들로 들끓는다. 그러므로 진짜 능력은 더 완벽한 목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록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미완성, 열림, 여백, 혼돈의 세계 앞에서 다빈치처럼 겸허해지기.

그림을 채우는 무수한 선들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가 그리는 선들로 채워진다. 우리가 그리는 선들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기도 하고 의지이기도 하다. 클레의 선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흘러다니는 욕망이 있다. 예기치 못한 만남들로 인해 방향을 틀고 속도를 바꾸는 의지가 있다. 흘러가는 욕망과 의지는 끊임없이 다른 흐름들과 부딪히기 때문에 흘러가다가 끊어지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가 하면, 거대한 바다를 이루기도 하고 실개천처럼 가늘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움직이는 선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선들을 만난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선을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만난다는 것. 그게 모든 선들의 운명이다.

세상은 반대되는 것들이 아니라 다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 다른 것들의 가치를 파악하는 우리의 마음과 눈이 다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들을 나누고 규정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름들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원은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정의는 추상적인 정의일뿐, 실제로 그런 원은 없다.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주변에서 잡아당기는 여러 힘들이 있을 때 비로소 원 비슷한 모양이 형성된다. 그렇게 보자면 원을 만드는 것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힘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중심'에 서고 싶어 하고, 중심에 있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의 중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또 다른 외부의 힘 때문에 그 자리는 중심이 아니게 된다. 도달해야 할 단 하나의 중심 같은 건 없다. 거꾸로, 자신이 있는 주변의 자리야말로 무수히 많은 중심들 중 하나다.
 이처러 세상은 하나의 원이 아니라 수많은 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럴진대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밴드를 조직하면서 원을 만들어갈 뿐. 이런 밴드에게는 '1등'이니 '꼴찌'니 하는 평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런 위계는 하나의 중심에서밖에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1등과 꼴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움직이고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유켈스.

호모 아르텍스, 채운

 

참으로 명확하구나. 참, 참, 참. 명확한 글쓰기다. 오랜만에 읽는 말투.
글로 다시보니, 누군가의 소리로 다시 들으니 문득 헉 한다. 맞아. 그렇지라고.
생각대로 되면 얼마나 좋아. 말만큼만 되면 얼마나 좋아. 글만큼만 되면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