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졸업하면 뭐 할거야.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내 주위에서 점점 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복학이 눈앞에 다가오고 2011년 8월이 달력 6장 넘기면 찾아오는 현실이라고 느끼자마자 다시 저 질문들이 내 앞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라진 거라면, 저 질문이 이제 나에게 내 세포 하나하나를 요동치게 할 만큼의 권위를 가지게 된 거랄까.

지금까지의 답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1)여행을 갈 거에요 2)공간을 만들 거에요 3) 서울을 떠나있지 않을까요? 와 같다. 더 옛날로 거슬러 가보자면... 난 대학을 졸업하면 마치 운명과 같은 내 길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광화문을 또각또각 소리내며 걸어 다니는 회사원이든, 일주일에 몇 번씩 성명서를 쓰고, 주말에도 거리에 나가는 활동가든, 혹은 깨알 같은 논문을 읽으며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는 것이든. 띠리딩! 하며 내 삶에 빛을 내려주는 나의 길, 마이 데스티니가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4년 아니 5년을 기다렸다.


그 기간 동안 따지고 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딱히 졸업 이후를 걱정하지 않은 채 그저마이 데스티니의 강림을 굳게 믿은 채 꽤나 치열하게 살았더랬다. 자기 소개서에 나 ‘류지은’ 대신 날 설명할 토익, 해외봉사, 어학연수, 학점, 각종 자격증을 만들어 놓기에 바쁘지 않아도 나 ‘류지은’이 그저 열심히 고민하고, 만나고, 움직이고, 충실하게 살면 내 길은 올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끝내 내게 오지 않았다. 내가 판 우물에선 물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난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이젠 비빌 언덕도 없는데 내 운명은 손 내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하루가 다르게 자신이 없어지고 비겁해지고 두려움만 많아진다.


‘졸업하면 여행을 갈 거에요.’ 라는 대답의 그 ‘여행’도 졸업 전에, 그것도 졸업논문을 대신하겠다는 호기로운 선언과 함께 4개월간 다녀왔고,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라는 대답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친구들과 함께 산지 어언 6개월째다. 그랬는데도 데스티니는 커녕, 여행 이야기를 꺼내면 가슴이 아프기만 하고 같이 사는 친구들에게는 그런 꿈 따위는 어느 순간부터 진솔하게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마음속으론 이미 다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방안을 뒹굴 거리며 하는 생각이라고는 정말 이것들이 내 운명이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찌질하진 않을 거야. 지금까지의 나의 역사는 어딘가에 홀린 채 벌어지고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얼른 자소서에 쓸 내 이름표들을 만드는데 열과 성을 쏟아야 할까 하는 생각들.........


나 역시 지금껏 대가를 바라며 하나씩 해치운다는 생각으로 걸어 온 걸까. 사실은 자소서에 쓸 항목 늘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걸까. 그것들을 해치우며 무엇을 바랬던 걸까. 어지럽기만 하다. 내가 가장 비겁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껏 ‘대학’이라는 공간 ‘대학생’이라는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었기에 졸업은 ‘끝’ ‘결말’이었고 내 서사 속에서 그 뒤는 광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만큼 했으니 길이 보이지 않겠어? 이만큼 했으니 좀 더 쉬워지지 않겠어? 하는 마음. 참으로 우습도다.


3월, 개강을 앞둔 시점 남들은 6학점 정도 들으며 취업 준비를 한다는 마지막 학기에 18학점을 꽉 채워 신청했다. 갈 곳이 없다, 나는. 하지만 갈 곳이 없다고 무작정 아무 지도나 뽑아들어 달려갈 순 없다. 지금까지 거부했던 길도,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도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욕심이 많은 걸까. 두려움이 많은 걸까. 기대가 많은 걸까. 실망이 큰 걸까. 쓸데없는 상념만 늘어간다. 요즘 같아서는 그저 자기 몫을 살아가는 이들이 다 경이로울 뿐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국 발을 떼는 그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지금의 나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다. 그저 이 자리에서 어지러운 채로 아침을 맞는다. 비록 나는 이래도, 해는 뜨고 다시 진다. 새는 날고, 나무는 봄 준비를 하고, 바람은 그 매서움을 내려놓는다. 오늘이 슬픔의 끝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눈은 떠지고, 숨을 쉰다. 옆에 있는 친구가 뒤척이는 소리도 들린다. 심지어 아침 햇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저 이런 걸까. 이렇게 이어지는 걸까. 이만큼 했으니 ‘무엇’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가 떴다 지듯이 반복되는 것일까.


차라리 빨리 졸업하고 싶다. 끝을 가정하지 않은 채로 시작하고 싶다. 그저 하루하루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라는 존재외에 어떠한 이름표도 붙이지 않고 숨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간절한 것이 없어도 좋다. 꼭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도 좋다. 운명이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 무엇을 이루려는 생각 그런 것들도 잠시 접어보고 싶다. 대학생, 대학 그 모든 이름표를 떼어냈을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있으며, 무엇을 필요로 하며, 어떤 속도를 가지고, 무엇에 웃고 우는지 보고 싶다. 오히려 이 기간을 못 견디고 하나를 선택해버리는 것.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이 도피이며 외면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심플하다. 졸업을 하면, 난 살 거다. 별 일 없이 살 거다. 하루하루 다른 아침 햇살을 볼 거다. 시시각각 미움과 애정이 왔다 갔다 하는 친구들도 계속 볼 거다. 마주할 때마다 내 존재를 의심하게 했다가, 날 절망하게 했다가, 부끄럽게 하는 이 세상도 계속 볼 거다.


쓰고 보니 그저 그런 청춘 영화의 넋두리다. 아니 청춘 영화처럼 ‘싸-’하지도 않고 텁텁한 것이 식상하기만 하다. 좀 더 나를 멋지게 포장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정치적 색깔을, 내가 했던 활동을/고민을/분노를. 하지만 날마다 느끼는 대로 난 딱 요 정도다. 아니 이마저도 힘들어 숨고 싶어 비빌 언덕을 찾아 헤매 이는 한 마리 어린양. 어린양의 눈이 아직 떠지는 걸 봐서, 먹고 싶은 것이 있는 걸 봐서 난 아직 괜찮다. 괜찮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 허접한 글을 실어주겠다는 친구들도 있지 않은가! 좋은 밤이다. 내일의 햇살도 눈부실 것이다.